인천대교를 ‘인천·맥아더 대교’로 개칭하자

  • 기사입력 2024.10.12 19:25
  • 최종수정 2024.10.15 22:27
  • 기자명 이석복 칼람니스트
▲ 이 석 복 수필가/화랑대문인회 회장)/전 육군 소장 
▲ 이 석 복 수필가/화랑대문인회 회장)/전 육군 소장 

나의 서재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제작한 달력 하나가 걸려있다. 9월에 접어들면서 8월 달력을 떼어내고 9월을 보니 15일과 28일에 아무런 표기가 없는 것이 새삼스럽게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아쉽게 다가왔다. 일반적인 달력에서야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예장교를 육성하는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에서 발행한 달력인데 6.25전쟁 시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던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날인 9월 15일과 북한군에게 빼앗겼던 수도 서울을 탈환했던 9월 28일에 아무런 표기라 없다니 말이 되는가?

2년전으로 기억하는데 육사교과과정에서 ‘6.25 전쟁사’가 필수과목이 아니라 선택과목이라는 것에 나라가 시끄러울 정도로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사실이 아니기를 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지난 9월 11일에는 육사에서 개최한 베트남전쟁 관련 세미나가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전투부대를 해외에 파병하여 약 8년간 베트콩 및 월맹정규군과 싸운 전쟁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있다는 반성의 소리가 나왔다. 육사교육을 누가 이렇게 망쳐놓았는지 분개했지만 그래도 스스로 뉘우치고 교과과정에 반영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현세대가 치른 우리의 현대전쟁사(6.25전쟁, 베트남전쟁)는 전국의 학생들에게도 기본적으로 교육되어야하며, 군사교육기관들에서는 각기 수준에 맞게 전문적인 내용으로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두 전쟁에서 너무도 많은 교훈을 선배들이 남겼기 때문에 반드시 학습해야한다. 그래야 잘못했던 점은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하고 잘했던 점들은 계승하고 발전시킬수 있다. 6.25전쟁 발발 당시 미국이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건의와 조치에 따라 그토록 신속하게 미군전투부대를 투입(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7월 1일 한국 도착)하지 않았다면 1950년 8월 15일은 광복절(光復節)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망국절(亡國節)이 될 뻔했다.

특히 미군도 제2차 세계대전 후 대폭적인 감군정책(총 89개 사단에서 10개 사단만 잔존)으로 가용전력이 부족하여 소련과 중공이 증강시킨 북한군에게 생각과 달리 낙동강전선까지 밀려가며 고전을 했다. 낙동강전선에서 더 밀리면 모두 죽는다는 위기상황에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사수(Stand or Die)”의지를 가지고 한·미군 공히 사력(死力)을 다해 처절하게 버티다가 미국이 낳은 군사천재인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킬수 있었다. 

1964년 내가 육사 4학년때 맥아더 장군이 주역이었던 태평양전쟁사와 6.25전쟁사를 공부했다. 그해 맥아더장군이 84세로 영면에 하셨기 때문에 더욱 뇌리에 그의 영웅성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후 대위로 진급하여 전방에서 중대장을 할 때였다. 맥아더 장군같은 군인이 되겠다며 그를 흉내를 낸답시고 선글라스에 파이프담배까지 피우면서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의 명언을 되뇌이며 겉멋을 내었던 우스꽝스러운 기억이 난다. 

작년에 육사에서 ‘자랑스런 육사인상’을 받았을 때 육사생도들 앞에서 ‘사관생도 신조’를 축약해서 ‘조국, 명예, 의무’를 강조한 것도 맥아더 장군이 ‘자랑스러운 미 육사인상(Thayer Award)’를 받으면서 강조했던 말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대령때 미국방대학원에 유학갔을 때 가족까지 동반하여 버지니아주 대서양 해안가에 있는 노폭(Norfolk)시의 맥아더 기념관을 방문하여 맥아더 장군을 더 깊이 탐구해야겠다는 자극을 받기도했다. 그후 960쪽에 달하는 ‘아메리칸 시저, 더글라스 맥아더’라는 영어원서를 오랜 시간 힘들게 읽으면서도 연신 감탄을 했었고, 번역본인 645쪽 짜리 ‘맥아더장군 회고록’을 독서삼매경에 빠져 순식간에 읽어내기도 했다. 

미국방대학원에서 밤을 새우며 썼던 ‘주한미군이 한국에 끼친 영향(The Impact of US Forces in Korea)’이란 논문(최우수논문으로 선정, 부교재로 채택)에서도 맥아더 장군이 북한의 침공으로부터 한국을 구해준 은혜를 한국민이 잊지않고 있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미국의 장군 중 맥아더 장군처럼 미국인은 물론 한국, 일본, 필리핀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장군은 없는 것 같다. 콧대 높은 유럽의 장성들도 미국의 맥아더 장군에 대해서는 진심어린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후 총반격작전으로 북진을 계속하여 압록강 근처까지 도달하면서 그렇게 염원하던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모두가 꿈에 부풀어있었다. 그런데 미심쩍었던 중공군이 초기 30만명(후에 최대 100만명)의 인해전술(人海戰術 ; 병력이 바다의 파도처럼 밀려드는 전술)로  역공격 해오는 바람에 유엔군은 전투력의 섬멸적 희생을 막기위해 피눈물을 머금고 38도선 이남까지 전략적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미정부가 맥아더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만주지역에 대한 폭격을 통해 중공군의 보급차단과 핵무기 사용을 건의했지만 트루만정부에 의하여 부결되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아쉬움에 가슴이 저려온다. 결국 맥아더 장군은 미정부와 갈등을 빚었고 일부 정치적 질시와 오해도 작용해 1951년 4월 11일 해임을 당했다. 미국 역사상 52년간 최장기복무한 이 위대한 군인 맥아더 장군은 마침내 쉼표를 찍게되었다. 미국민과 미의회는 15년만에 전쟁터에서 귀국한 맥아더 장군을 유래없이 열정적으로 환영했고 최대의 존경심으로 맞이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천시 자유공원에 맥아더 동상이 건립되어있고, 매년 헌화와 참배로 시민친화적으로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내년 2025년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제75주년이 된다. 마침 우리 정부와 인천광역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의 상징인 노르망디 상륙작전기념관과 기념식을 벤치마킹해서 월미도에 기념관을 건립하고 상륙작전에 참가한 국가의 정상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모처럼 국민의 안보의식 제고와 상륙작전 참가국에 대한 보은의 행사를 계획한 정부와 인천광역시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이 기회에 성공확률 1/5000이라는 인천상륙작전을 기적적으로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인천대교’에 대한 개칭을 제안한다. 인천대교는 인천상륙작전의 그린비치(Green Beach)를 가로지르는 해상대교로서 맥아더 장군이 월미도로 상륙작전하며 통과했던 지점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인천 맥아더 대교’라는 새 이름으로 개칭하여 명명식을 추가한다면 화룡점정이요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이것은 곧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영원히 후세에 알려질 것이고 맥아더 장군에 대한 한국민의 감사를 의미할 것이다. 육사에도 달력 제작시 ‘육군사관학교 달력’답게 표기를 개선하도록 조언을 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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