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NGO신문=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예로부터 신산으로 알려진 원릉산은 탄현면 금송리, 월롱면 덕은리, 금촌 야동동에 걸쳐 있는 해발 246m의 월롱산이다. 두 개의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는 산은 월롱면 덕은리와 야동동 쪽은 ‘파주 월롱산’, 탄현면 금송리 쪽은 ‘교하 월롱산’이라 부른다. 월롱산 서쪽에는 해발 높이가 비슷한 기간봉이 있다. 이곳에는 늘 측량을 위한 깃대가 꽂혀 있어 깃대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곽은 월롱산 정상부의 내성과 동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가위 모양으로 둘린 외성으로 구성된 백제의 전형적인 태뫼식 산성이다. 성곽의 길이는 1,315m, 면적은 33,232m² 정도로 경기도 지역의 산성중 비교적 대규모에 속하는 산성이며 서벽은 토석을 혼합하여 축성하였다.
성내에는 군부대가 있어서 군사시설로 사용했던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깃대봉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파주 일대가 조망된다. 즉 천연 요새에 손색이 없는 곳이다. 적군이 어디에서 달려오고 있어도 모두 시야에 들어온다. 이 산성은 3~5세기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삼국이 대치하고 있을 때 사용되었던 성이다. 성의 외벽은 25m 이상의 자연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부분적으로 축성되었다.
한강과 임진강이 시야에 들어오니, 옛 월롱산성이 어떤 역할을 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초기 백제 때 임진강과 한강 하구 지역을 통제하던 주성 역할을 했던 성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관심밖에 남게 되었던 월롱산성은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고, 자연에 의해 무너지고 인공에 의해 파헤쳐지면서 성곽의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로 방치되었다. 역사적으로 월롱산성의 중요성을 접근 하면의 발굴 조사에 이르면서 그동안 잠들어 있는 사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산성은 한강 유역에 자리한 백제가 남진하는 고구려와 말갈 세력을 방어하고, 임진강 유역과 한강 하류의 교역망을 장악하기 위해 축조된 산성이다. 백제 한성기에 축조되었음을 확인하는 증거가 성안에서 4세기 때 백제의 것으로 편년 되는 격자문 토기편이 채집되었다.
월롱산성에 대한 기록은 조선 전기의 각종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조선 중기에 편찬한 지리지에 “月籠山在州西十五里“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이전에 이미 월롱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大東地志』(1864)에는 월롱산과 월롱산성에 관한 기록이 있다. “月籠山西十五里交河界“· ”月籠山古城俱有遺址“라고 하였다. 즉 월롱산은 서쪽 오십리에 위치하고 교하와 경계하며 월롱산 고성은 그 유지만 남아 있다는 내용이다. 1942년에 편찬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월롱산성의 위치와 유지에 대한 기록이 있어 이곳에 오래전부터 산성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월롱산 정상부에서 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 북동쪽에는 파주평야와 임진강 일대가, 서쪽으로는 교하면 일대의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물길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고양 일대와 북한산, 관악산까지 조망된다. 정상부를 활용한 것이 바로 산성이다. 월롱산 정상부에 산성이 축조되었다. 성벽은 서남쪽으로 수직의 자연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동남쪽 산의 가파른 경사면을 이용하였다. 내성의 전체 형태는 남북으로 세장한 타원형이며 외성은 동북쪽 망루에서 가위 모양으로 뻗어 있다. 성내는 비교적 고도 차이가 완만하게 서동 쪽으로 기울어 있다.
월롱산에서 주변을 보면 임진강의 주요 지류인 문산천과 공릉천이 흐르고 있다. 동쪽의 문산천은 북류하여 임진강 하류로 흐르고 남쪽의 공릉천은 서쪽으로 흘러 오두산성 남쪽에서 한강 하류로 합류된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월롱산성 지역은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임진강을 따라 분포된 관방체계와 월롱산성도 이 시대에 정비되었을 것으로 본다, 월롱산성 주변의 관방유적은 동북쪽으로 문산천변에 봉루산성과 서남쪽으로 오두산성, 공릉천변으로 장명산보루, 심학산보루, 오봉산성이 위치하며 동북쪽으로 임진강 북안으로는 당포성, 아미라보루, 호로고루, 덕진산성, 도라산봉수, 조랑진보루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남안으로는 육계산성, 이잔위성, 금파리성, 이민진, 장산진 위치하고, 임진강 남안 내륙으로 하미성, 수철성, 칠중성, 감악산보루, 파평산보루, 노고산보루 등 다수의 관방유적이 분포한다.
월롱산성의 서벽은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석벽을 활용하였는데 남쪽에서 체육시설 부근까지는 금광 채셕으로 인해 자연 암반 지형이 약 20M 손상되어 있어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서벽에는 서남문지와 서북문지가 조성되어 있고 인위적으로 쌓은 외벽 2곳이 확인되며 그 높이는 약 25M 정도이다.
북벽은 서북치성지에서 동북치성지까지 이어지고 중간에 북문지가 있다. 서북치성지에서 북문까지의 지형은 북문에서 동북치성지 지역보다 2M 정도 높으며, 그 이유는 동쪽으로 경사가 진 자연 지형이기 때문이다. 북 성벽의 외부는 서벽과 같이 자연 암반과 가파른 자연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의 내부는 약간 경사져 있으며 성벽의 외부에는 군 참호가 동벽까지 이어져 있다.
동벽은 동북치성지에서 남쪽으로 이어지고 동벽은 북문지에서 동쪽으로 회절되었다. 성 외벽에는 참호가 이어지며 벙커로 조성되어 있다. 외벽 하단은 북문지 부근까지 평탄지이며 외성으로 이어지면서 급경사로 이어진 자연 지형이다. 남벽은 지적 삼각점에서 서쪽으로 약 20M 이상 더 나아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금광 채석으로 인하여 본래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서남문지는 체육공원의 남쪽 하단에 있으며, 문지의 좌우로는 자연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고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문지 너머로는 채석으로 인해 모두 손상되었다. 서북문지는 문지 앞의 자연 암반을 반원형으로 깎아서 만들었다. 문지의 하단은 자연 경사면으로 비교적 완만하며 기간봉으로 가는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북문지는 북벽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월롱산성으로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문지 하단은 자연 암반을 깎아 만들었다. 동문지는 동벽의 중간 위치에 있으며 동부치성지의 우측에 오솔길이 있으며 좌측으로 자연 암반이 있다. 동남암문지는 체육공원에서 동남쪽으로 약 40M 정도 가면 바위 사이로 내려갈 수 있는 암문이 있다.
월롱산성에는 서북치성, 동북치성, 동부치성이 자리 잡고 있다. 서북치성은 산성의 서북쪽 끝부분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참호로 훼손되어 있다. 이 치성에서 관측할 수 있는 범위는 서쪽의 기간봉, 오두산 통일전망대, 한강, 심학산이고, 북쪽으로 임진강과 북한의 개풍군, 동북쪽으로 문산 일대가 관측된다. 동북치성은 북벽과 동벽이 만나는 부분이다. 치성지에서 외성의 북벽이 동쪽으로 뻗어있고 우측으로 가위자 모양으로 외성이 이어지고 있다. 치성지 하단에는 참호가 둘려 있다. 이곳에서 관측할 수 있는 범위는 정면으로 문산, 좌측으로 임진강과 북한의 개풍군, 우측으로 문산천과 임진강이 만나는 부분과 봉수산, 감악산 등이 조망된다. 동부치성은 동벽의 중간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치성지의 외벽은 자연 암반이고 절벽 경사면이 가파르기 때문에 사람의 접근이 어렵다. 이 치성에서 관측할 수 있는 범위는 문산천과 문산 일대, 금촌과 북한산 일대가 조망된다.
성 내부의 전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연질과 경질의 격자타날문토기인 백제토기편이 대부분이다. 그중 한성백제 시기의 전형적인 토기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많이 출토된 고배류도 수습되고 있다. 백제 토기 외에는 통일신라 시기의 인화문 토기편, 외반구연단경호편도 일부 확인되며, 고려 및 조선시대 토기도 약간 수습되었다.
월롱산성은 석재의 공급이 유리한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석재가 일부밖에 사용되지 않는 석심토축이나 토축으로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신라성과는 계통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 유물이 전혀 수습되지 않고 고구려의 축성 기법과 차이를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