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 지역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의 영토이며 당시 ‘마전천’ 또는 ‘니소파홀’이라 불렀다. 이후 신라 땅이 되면서 중국식 한문 지명은 ‘임단’으로 고쳐 불리면서 우봉군의 영현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고구려 때 불렀던 ‘마전’으로 고쳐 현종 9년(1018년) 장단군에 예속되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고려 태조를 모신 숭의전이 자리해 ‘마천군’으로 승격되었고 일제 강점기 행정 통폐합에 의해 연천군이 되었다.
연천으로 흐르는 임진강은 삼국시대만 해도 세력다툼의 각축장이었다. 고구려는 남한강 유역 충주까지 세력 확장했으나 신라의 반격으로 임진강까지 물러나면서 고구려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임진강을 방어 수단을 삼았다. 신라는 한강 이북, 임진강 남쪽에 성을 쌓아 고구려와 대치하였다. 지금도 임진강 남쪽에는 신라의 성곽 흔적이 남아 있고, 임진강 북쪽에는 고구려 양식의 성곽과 보루가 남아 있다. 임진강은 여울이 얕아 배를 이용하지 않고 도강할 수 있는 곳이 여러 곳이 있다. 이런 곳에 고구려는 신라의 북상을 막기 위해 전초기지를 삼았다.
임진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강의 왼쪽 강안의 단애 위에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이 있고 강을 끼고 있는 얕은 산에는 덕진산성과 대전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데, 덕진산성과 대전산성은 다른 성에 비해 높은 곳에 있어 사방을 주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성이다. 그러나 호로고루와 당포성, 은대리성은 강안의 단애 위에 구축된 삼각형의 강안평지성으로, 매우 특이한 형태를 지닌다.
이렇게 단애 위에 있는 성은 개성 또는 평양에 가기 위해 가장 수심이 낮은 곳이어서 쉽게 건널 수 있는 곳에 축성된 것은 감시와 통제, 방어에 목적을 둔 것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에는 나룻배를 이용하겠지만 우기가 아닐 때는 직접 걸어 건너거나 말, 우마차를 타고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강을 경계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서로 영토 확장을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였던 삼국시대에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어를 위해 세워진 성은 지금도 그 흔적이 알 수 있다. 특히 당포성은 당개나루 요충지를 통제하던 방어 성곽이었다.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어 임무를 수행해 오다가 신라가 한강 이북으로 진출하면서 신라에 의해 다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백제가 이 지역을 점령하였을 때의 지명은 공목달이었으며, 고려 후기인 1309년 지금의 연천(漣川))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포성은 파주의 적성면 어유지리 방면에서 마전을 거쳐 삭령에서 토산을 거쳐 신계 방면으로 같은 교통로에 있어 양주 방면에서 북상하는 적을 방어하는 데 전략적 중요성이 매우 크다. 반면 이곳은 임진강을 건너 양주 방면으로 남하하는 적을 방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위치이므로 나당 전쟁 이후 신라가 진출하여 당포성의 외벽에 석축 벽을 덧붙여서 보강하고 계속 활용하였다.
당포성에 대한 기록은 미수 허목(1595~1682)의 『기언별집(記言別集)』 권 15 「戊戌舟行記」에 “마전(麻田) 앞의 언덕 강벽 위에 옛 진루가 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총사(叢祠)가 있고, 그 앞의 물가를 당포라고 한다. 큰물이 흘러 나루 길로 통한다. [麻田前岸江壁上有古 壘 今其上爲叢祠 其前浦曰堂浦 大水則津路所通…]” 가 유일하다. 이 글에 당포성을 “고루(古壘)”로 언급한 것으로 보아 17세기에는 이미 폐성된 지 오래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포성의 배후에는 개성 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마전현이 자리하고 있어, 양주 분지 일대에서 최단 거리로 북상하는 적을 방어하기에 당포성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북진 시에도 강의 북안에 교두보를 확보해야 하므로 신라의 점령기에도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포성이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하게 된 것은 1994년 육군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였다. 정식 발굴은 2002년 10월에서 2003년 5월까지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국방유적연구실에서 실시하였으며, 자료의 희소성과 역사적 사료 가치가 높은 귀중한 문화유적으로 인정되면서 2006년 1월 2일 국 가지정문화재 제468호로 지정되었다.
2003년 이후 2차에 걸친 발굴 조사를 통해 성의 구조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 성벽의 외면에는 보축시설이 3~4겹 덧대어져 있었다. 성 밖의 저지대에는 대형 해자가 너비 6m, 깊이 3m 규모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신라 성벽의 해자이다. 성벽 외면에는 ‘구멍기둥(주동 또는 석동)이라 하는 단면 방형의 수직 홈이 일정 간격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것은 고구려 축성 기술과 관련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수직 홈은 약 1.7m 간격으로 배치되었고, 홈의 횡단면 규격은 41x42cm가량이다. 확의 상면에 패인 구멍은 길이가 7cm, 지름이 31~22cm이다.
성벽은 석축을 기본으로 하지만 내부에 토축부를 갖추었고 외벽은 보축병을 설치한 점 등 축조 기법은 호로고루와 거의 같은 형태이다. 수직 단애를 이루지 않은 동쪽에만 석축 성벽을 축성하였다. 동쪽의 성벽은 길이가 50m에 이르며, 높이는 6m 정도이다. 동벽에서 성의 서쪽까지의 길이는 약 200m에 이르며 전체 둘레는 450m 정도로 호로고루보다 약간 큰 규모의 성이다. 동벽이 내외성의 2중성으로 구축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것은 동벽에서 70m 거리에 외성으로 추정되는 토루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기저부와 중심부는 판축으로 구축되었으며, 판축토 위에 체성벽이 올라가고 체성벽 바깥쪽에 암반층에서부터 쌓아 올린 보축성벽을 쌓아서 체성벽의 중간 부분까지 이르도록 하고 보축성벽의 바깥쪽에는 중간 부분부터 다시 점토를 덧대어서 보강한 구조이다. 보축성벽과 보강토의 기저부에서 2m 정도 이격된 지점에서부터 신라가 새로운 성벽을 덧붙여 쌓았다. 도로개설과정에서 드러난 토루 단면의 바닥 부분에서 고려시대 기와편이 있었는데 이것은 고구려와는 관련이 없는 후대 구조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고구려의 성돌은 현무암 돌을 사용했지만, 신라성벽의 성돌은 화강편마암을 사용하였다. 신라의 와적층은 화강편마암이 덧붙여쌓은 신라 성벽 기저부에서부터 동쪽으로 길게 연결되며 두텁게 쌓여 있음이 확인되었다. 2013년에는 연천군과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당포성 외부공사 구역 내 시굴 조사를 하였다. 조사에서 고구려에 의해 성이 축조되었으며, 여러 건물터와 수혈유구 등이 확인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의 유구와 중복되어 있었다.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은 선조문과 격자문이 타날 된 회색의 신라기와 경질 토기편이 주류를 이루지만 고구려 토기편과 기와편도 확인되었다. 고려-조선시대의 와편도 많이 발견되었으며, 성벽 기저부에서는 경질무문토기편과 타날문토기편도 확인되었다. 특히 고구려 기왓조각은 대부분 적갈색을 띠며 승문이 주류를 이루며, 특이한 점은 기와 내면에 모골와통에 의한 모골흔과 함께 횡방향으로 2차 타날 된 승문이 찍혀 있었다. 이러한 것은 모골와통에 의하여 요철이 심하게 된 기와 내면을 2차 정면하기 위하여 둥근 방망이에 노끈을 감아서 타날 한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연천군은 『경기도 고구려 유적 종합정비기본계획』과 『연천 고구려 3 대성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따라 당포성에 대한 정비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오랫동안 손이 닿지 않아 폐허처럼 되었던 당포성의 동쪽 성벽을 보수하였다. 또한 성벽 위에는 전망대를 설치하여 관광객이 직접 성에 올라서서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어려운 여건에서도 성상에 뿌리를 내리고 사계를, 성을 잡고 있다. 느티나무 동벽에 드러나 있는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성벽의 성돌을 잡고 있어 더 이상 무너지는 것을 막고 있다. 관광객은 이 나무를 ‘당포성 나 홀로 나무’라고 부른다.
진입 도로를 비롯한 편의 시설과 당포성의 역사적 사실 등을 알리는 해설 안내를 갖추어 역사 문화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