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변 삼국시대의 성지(城址) ‘은대리성’

문화재 : (사적) 연천 은대리성(漣川 隱垈里城)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77 등

  • 기사입력 2025.03.15 23:15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은대리성 동벽과 성문지
▲은대리성 동벽과 성문지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하여 경기도와 강원도를 거쳐 임진강과 합류하는 약 136km의 하천이다. 용암지대 위를 흐르는 독특한 현무암 계곡과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고, 한국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

한탄강은 약 50만~12만 년 전 북한 평강 지역에서 발생한 화산 폭발로 인해 용암이 흘러 내려와 지금의 한탄강 일대에 현무암 협곡을 형성했다. 이에 따라 지금의 주상절리, 협곡, 폭포 등이 발달하게 되어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은대리성 서쪽 성문지
▲은대리성 서쪽 성문지

한탄강 일대는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이었으며, 특히 철원 지역은 고구려의 남진 거점 역할을 했다. 한탄강을 경계로 신라와 고구려의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거란이 침입했을 때, 강을 이용한 방어선이 형성되었다.

한탄강 일대에서 고려군과 거란군 간의 교전이 발생했다. 조선시대에는 고석정이 한탄강변에 세워졌으며,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되었다. 한국전쟁(1950~1953년) 때는 한탄강 유역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 중의 한 곳이다.

특히 철원과 연천 지역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 및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으며,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지금도 전쟁 당시의 벙커, 참호, 격전지 등이 많이 남아 있다.

한탄강의 주상절리와 협곡은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장소였으며, 고석정은 많은 시인과 문객들이 찾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들이 남아 있다.

▲은대리성 동쪽 성문지
▲은대리성 동쪽 성문지

연천 은대리성은 연천군 연천읍 은대리에 위치한 고대 성곽으로, 한탄강을 따라 형성된 요새 중 하나이다. 이 성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장악했던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고구려는 신라 및 백제와의 전투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임진강과 한탄강 일대에 여러 성을 축조하였으며, 은대리성도 이 방어선의 일부로 가능성이 크다. 한탄강 절벽을 이용한 자연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고구려 성곽의 특징 중 하나이다.

연천 지역은 고구려 남방 방어선의 핵심 거점이었으며, 은대리성은 임진강과 한탄강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동쪽에서 본 성상
▲동쪽에서 본 성상

6세기 후반 이후인 551년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은대리성도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6세기 후반 이후 신라는 고구려와 대립하며 한탄강 일대를 방어하는 역할로 성을 활용했을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은대리성은 북방 방어를 위한 거점으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거란과의 전쟁(993년, 1010년) 및 몽골 침입(1231년~1270년) 시기에 이 지역이 중요한 방어 기지로 활용되었을 수 있다.

고려 후기에 들어서는 성의 기능이 악화하였지만, 여전히 국경 방어선의 일부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경 방어 개념이 변화하면서 은대리성의 역할이 점차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후기에는 일부 지역이 민간 정착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후 퇴락하면서 현재 일부 성벽과 유적지만 남게 되었다.

▲동쪽 성밖에서 본 성벽
▲동쪽 성밖에서 본 성벽

은대리성의 발굴 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 및 관련 연구기관에서 2000년대 이후 지속적인 발굴 조사는 성곽 구조와 축성 방식 확인, 유물 발굴을 통한 역사적 가치 규명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먼저 성곽의 축성 방식은 고구려식 석축 성곽임이 확인되었다. 육군박물관에 의한 지표조사에 상세한 내용이 수록되었고 2003년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어 성벽의 구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성벽은 호로고루와 당포성과 같이 천연 절벽을 활용한 자연 방어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일부 구간에는 돌을 쌓아 보강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3~5m 정도로 추정되며, 돌을 다듬지 않고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는 허튼층쌓기 방식인 고구려 성곽의 특징을 보인다. 일부 구간에서는 기초 층에 큰 돌을 깔고 그 위로 갈수록 작은 돌을 쌓는 방식을 취했다. 경사가 급한 구간에서는 상대적으로 낮고 완만한 구간에서는 높게 쌓았다.

▲서쪽 성문지와 동쪽 방향의 성벽
▲서쪽 성문지와 동쪽 방향의 성벽

남한 지역에서 확인되는 중요한 고구려성 중의 하나이다. 차탄천이 한탄강에 합류하는 지점으로 성은 두 하천에 의하여 형성된 삼각형의 침식대지 위에 축조되어 있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한탄강은 임진강에 합류하고 서울과 원산을 잇는 교통로로 활용되어 왔던 추가령 구조곡에 접하여 있다.

성의 동쪽과 서쪽에 성문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구간에서는 방어시설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출입 시설과 보루 흔적인 확인 되었다. 문터 주변에는 비교적 정형화된 돌을 이용한 기초 구조가 남아 있는데,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문 주변에는 방어벽을 덧대는 방식이 적용되었을 가능성과 성벽 바깥쪽 일부 구간에 방어용 보루 또는 망루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은대리성의 평면은 삼각형이며 남벽과 북벽의 일부는 강변의 자연 단애를 이용하였으며 동쪽 평탄지에만 지상 성벽을 구축하였다.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동벽은 내성과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으며, 외성의 전체 규모는 1,069m이고 내성의 둘레는 230m이다.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다. 치성은 성의 북동 회절부와 북문터 서쪽 및 남문터 서쪽에서 확인되었다. 북문터와 남문터 서쪽의 치성은 8×5m의 동일한 규모로 체성에서 ㄷ자 형태로 돌출시켜 성문의 방어력을 높였다. 이처럼 성문 주변에 방형 치성을 설치하는 구조는 고구려 산성의 특징이기도 하다.

▲성밖에서 본 은대리성 성벽
▲성밖에서 본 은대리성 성벽

성벽은 호로고루나 당포성에 비하여 성벽의 높이도 낮고 견고함도 떨어지지만, 기본적인 성벽의 구조는 거의 동일하다. 노출된 성벽의 단면에서 성벽의 기저부와 중간 부분은 점토와 모래로 판축을 하였고, 성의 외벽과 내벽만 석축을 한 구조이다. 이런 형태의 축성 기법은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과 평양의 대성산성에서도 확인되는 고구려의 특징적인 축성 기법으로서 축성이 용이한 토성의 장점과 방어력과 유지관리의 효율성이 높은 석정의 장점을 결합한 형태이다. 은대리성의 축성 기법이 호로고루나 당포성과 기본적으로 유사하지만, 차이점은 동벽의 외벽에 보축성벽을 쌓지 않았다는 것과 성벽의 높이가 높지 않지만, 남벽과 북벽에도 동일한 구조의 지상 성벽을 쌓았다는 점이다.

성 내부에서는 대형 건물터 1개소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기와 조각, 토기 파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성 내부에 군사시설과 생활공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발굴된 기와 조각과 토기의 양식은 고구려 후기에서 신라 초기의 것으로 밝혀졌다. 건물터는 남벽에 인접한 외성 중앙부에 위치해 있는데 건물의 외곽담장 축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가 사방에 3m 폭으로 무너져 있다. 담장의 내부 공간은 동서 60m, 남북 30m 정도로 대규모 건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및 고려 시대의 토기 조각도 발견되어, 은대리성이 오랜 기간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위에서 본 은대리성과 한탄강,차탄천
▲위에서 본 은대리성과 한탄강,차탄천

출토 유물은 대부분 고구려 토기편이며 소량의 철제 유물인 철제 화살촉과 창끝, 칼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군사적 활용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농경 도구로 보이는 유물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장기 주둔 및 생활 가능성을 보여준다. 확인된 토기 중 완형 복원이 가능한 토기는 검은색을 띠고 있으며 두 개의 가로날 손잡이가 달리고 외반된 구연에 평저 바닥을 갖춘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 항아리이다. 특이한 것은 토기의 어깨면에 음각 물결무늬와 점열문이 찍혀 있다.

은대리성은 단순한 고대 성곽을 넘어 고구려 시대의 군사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고구려는 당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지배하며, 외부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성곽을 축조했다. 은대리성 역시 그중 하나로, 고구려의 방어 전략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성곽으로 평가된다. 오늘날에도 고구려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장을 열어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 성곽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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