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행복에는 가슴 적시는 뜨거운 눈물이 있다. 그들의 말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고 그들의 글은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 한 시골의 야간학교 30주년 홈커밍 행사는 학생과 교사가 한마음이 되는 축제장이다. 배움의 열정에는 아름다운 결실은 있어도 포기는 없고 하물며 절망도 없다.
할머니 학생 한 분이 부끄러운 듯 발갛게 물든 얼굴로 기념 문집에 실린 자신의 글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
“내가 살아온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두운 세상이었습니다. 한글을 모르고 살았던 나는 어디 를 가도 기가 죽어 말을 못하고 그저 속이 상해 속으로 울었지요. 지금은 한글을 배우고 보 니 이렇게 좋을 수 없습니다. (중략)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군에 간 아들이 보고 싶어 글을 쓰다 지우곤 하던 편지를 이제는 제대로 쓸 수 있게 되어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학생도 있다. 선생님이 시 한 소절로 답장을 덧붙였다.
글아 글아 게 좀 섰거라/붙잡는데도 자꾸만 달아나니?/어르신들이 애타게 널 부르시는데/넌 들은 척도 않고 머물지도 않고/자꾸만 도망만 치는구나. 버릇없이.
누구든 자기 이름이 불리면 단상으로 올라와 오랜 속내를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머리가 백발이 된 졸업생은 이렇게 술회했다.
“제가 공부를 못한 것은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서 여자라고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가 난한 집 맏딸이라 부모님은 동생들 업어 키우라고 학교에 못 가게 했습니다. 그 안타까움을 안고 우리 야학을 통해 꿈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나라 개발 시대 젊은 여성들이 공장에 다니거나 버스 안내양을 하면서 동생들 공부시키는 게 삶의 유일한 목표요 행복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곳을 찾는 노년들은 그렇게 학습의 기회를 놓치고 이제야 느지막이 야학에 들어온 것이다. 자신의 무지를 수치라 여기면 배움의 터전에 나서지 못한다.
나의 어머니도 무학이셨다. 집안의 넷째에 따님으로는 막내로 태어나 가난한 살림에 위로 외삼촌들에게만 학업의 기회가 주어지니 어머니에게 학교는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우리 삼 형제를 대학에 보내면서 공부하지 못한 한을 푸셨고, 종가 고유제(告由祭) 때 자식 둘의 행적을 조상님께 올리신 자랑스러운 분이었다.
어머니는 어깨너머로 배운 글솜씨가 있어 글을 쓸 때는 마음가짐을 정결히 하고 긴 모조지에 발음 나는 대로 써 내려가시곤 했다. 나의 조상이신 초산(楚山) 선생의 <북천가(北遷歌)>를 필사하여 읊조리던 기억도 생생하다. 평생을 야학에 헌신한 야학 협회장은 옛 어머니들에게 죄스럽지만 그들의 희생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안쓰러워했다. 어머니는 주변에 작은 야학이라도 있었다면 정말 열심히 배우셨을 것이다.
야학은 나이 든 분들에게 글의 기본을 깨우치게 하는 문해(文解) 반과, 상급 학교 진학을 목표로 젊은이들이 주로 공부하는 중등반과 고등반으로 나누어진다. 우리의 문해 정책은 140여 년 전 문호 개방에 맞추어 국민 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다.
해방 당시 문맹자가 78%에 달한 이후 지금은 거의 해소되었지만 요즘도 야학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변변한 학습공간을 구하지 못해 교회와 건물 지하 창고나 옥탑방을 전전하는 학교도 많이 있다고 한다.
“배움이 없는 가르침은 없고, 가르침이 없는 배움도 없다.” 브라질의 교육학자인 파울로 프레어리(Paulo Freire)의 말이다. 배움과 가르침은 한 곳에서 자라나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실제 야학 출신 학생이 상급 학교에 진학하여 졸업 후 야학의 교사로 돌아온 분들이 꽤 있다.
야학하는 이들은 낮에 일하고 밤에 학교로 와서 늦도록 학업에 열중한다. 모르던 것을 하나둘씩 알아갈 때 얼마나 뿌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세상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행복감을 만끽했을 것이다.
그들의 축제를 바라보다 내가 초대받은 손님이라는 게 새삼 겸연스럽다. “여기가 우리 학교야” 하며 문을 열고 들어갈 교실조차 없어 거리를 헤맨다는 어느 학생의 절규에 가슴이 아린다. 나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행사장을 나서는데 오늘따라 밤기운이 유난히 묵직하다.
(전 한국지방재정공제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