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변의 호로고루, 당포성과 한탄강변의 은대리성는 평지에 성을 축성한 평지성이지만, 대전리산성은 한탄강의 지천인 신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자리한 해발 140m의 성재산을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평지성은 멀리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전망대를 두어 그곳에서 감시 임무를 띠지만, 대전리산성은 높은 산에서 적군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으며 더 멀리 더 넓은 지역을 감시하는 임무를 띤다.
대전리 산성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매소성 전투로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특별한 전투라는 역사적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라가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660년 백제를 패망시키고, 뒤이어 668년에는 고구려까지 멸망시켰다. 전쟁이 끝나자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직접 지배하였으나 신라에 대해 아무런 대가가 없었다. 더구나, 당나라는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신라왕을 계림주도독으로 격하시켜 신라의 자주권마저 빼앗으려 하였다.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신라는 고구려를 패망 시킨 뒤, 곧 당과의 전쟁을 치러 정당한 이권과 자주성을 찾고자 하였다. 이 기간에 패망한 고구려는 각지에서 부흥군이 크게 일어났으나 차츰 당나라 군대에 밀려 신라 역내로 들어 왔다.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가 고구려 유민인 고연우와 함께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 당나라 군사와 치룬 전쟁으로 본격적으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당나라는 한병을 거느린 고간과 말갈병을 거느린 이근행을 보내어 평양과 황해도 방면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본격적인 전쟁은 673년 무렵 임진강을 경계로 고착상태로 있다가 675년 유인궤를 계림대총관으로 삼아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여 신라 9군과 맞섰다. 675년 2월에 유인궤에 의해 칠중성이 함락되면서 신라는 당에 사죄사를 보냈다. 당은 칠중성 전투의 기세로 기병 7만을 포함한 최정예 20만대군이 매소성 부근에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 매소성을 현재 대전리산성으로 보고 있다.
설인귀는 한강 하류 천성으로 침입하여 일대를 장악하고 임진강을 경계로 형성된 전선을 한강선으로 재조정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신라 장군 문훈 등이 이끄는 약 1~3만의 신라군이 당군을 공격하여 말 1천필을 노획하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신라군이 매소성을 공격하자 당 이근행의 20만 대군은 말 30,300필과 많은 병기를 버리고 북쪽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의 패배 이후 당은 원정군의 보급문제와 국내여론 악화와 더불어 토번의 중국 침입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원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땅을 모두 신라에 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당나라는 이를 파기하고 오히려 신라를 완전히 점령하여 한반도 전체를 당나라 영토를 만들려는 야욕을 가졌다. 처음부터 신라에 파병한 이유가 이련 야욕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통일이 이루어졌으나 신라가 얻은 것은 아무도 없었다. 당나라는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고구려영토를 지배했고, 웅진에 웅진도호부를 두어 백제의 영토를 당나라 영토로 편입했었다. 당나라 이세적 장수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까지 복속시키겠다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신라의 조정에서 당나라의 의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신라의 백성은 더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으나 당나라 군대의 곡식과 물자를 공급하느라 이전보다 더 생활의 형편이 좋아지지 않고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당나라 군사들은 부녀자 겁탈, 노략질 등으로 분노가 끓고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역시 당나라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 왕실 후예인 안승과 검모잠의 지도 아래 국권회복 투쟁을 진행했다. 670년 봄 평양성이 점령당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신라와 당나라의 갈등이 본격화됐다. 당나라는 고구려 옛 영토를 복속하고 나서 통치를 담당하기 위해 만든 안동도호부의 군정통치가 원활하게 운영이 되지 않자 말갈군 일부를 끌어들여 요동 일대로 진출했다.
이때 신라 문무왕은 사찬 설오유(薛烏儒)를 보내 고구려 태대형 출신의 고연무(高延武)가 이끄는 부흥군 2만명과 연대하게 했다.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은 합동 작전을 벌여 압록강을 건너 말갈족 부대를 크게 이겼다. 이 소식을 들은 당나라 군대는 크게 흥분했고 대군을 압록강 일대로 보냈다. 신라군은 일시적으로 후퇴를 했으나 당나라는 신라가 고구려 부흥군과 연대해 당나라를 고구려 고토에서 몰아내려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결국 당나라와 고구려, 백제 부흥군과 연대하는 신라 두 세력은 또 다시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나당전쟁이었다.
대전리산성은 은대리성에서 한탄강을 따라 약 500m 거슬러 올라오면 성재산에 위치한다. 청산면 대전리에 자리하고 있어 대전리산성이라고 불린다. 이 산성은 신라가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매소성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장소이다. 삼국통일을 위해 꿈꾸왔던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이후 한반도 점령의 야욕을 품은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할 수 있는 결정적 돌파구가 된 장소가 지금의 대전리산성이다.
대전리산성에서 이쪽 방향으로 흘러드는 한탄강과 전곡읍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주변의 상황을 감시하고 긴급으로 대처하기에 용이한 장소이다. 임진-한탄강 일대에서 신라 성곽의 구조가 확인된 최초의 유적이다. 산성의 규모는 둘레 674m, 성내부 면적 13,086㎡로 크지 않지만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 남북을 연결하는 고대 교통로(삼방로)의 한탄강 도강지점을 통제하는 군사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6세기 말 신라에 의해 처음 축조되었다.
성벽은 남동쪽 봉우리에서 서북쪽 산등성이를 따라 석축으로 쌓은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중 서북벽 일부구간에서 내탁으로 쌓았던 잡석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성돌 중에 앞면은 넓고 뒷면은 좁은 화강암으로 축성하였는데, 이러한 형태의 성돌은 신라성벽의 전형으로 본다. 남벽에서는 흩어져 있는 성돌 중에 반질반질한 강돌이 발견되기도 한다.
성은 2차례에 걸쳐 조사 되었다. 1차 조사는 2013년 경기문화재연구소에 의해, 2차는 2014년에 고려문화재연구원에서 진행하였다. 1, 2차 걸쳐 조사된 결과는 보축기단, 보축성벽, 시기를 달리하는 건물지가 확인 되었다. 초축성벽은 1·2차 조사지역 전역에서 확인되며, 전형적인 편축식 성벽이다. 성벽은 원지형을 굴착한 후 외벽부터 쌓아 올리고, 일정 높이부터 내·외벽을 동시에 축조하였다. 내벽과 굴착면 사이에는 사질점토를 다져 회곽도를 조성하였다.
기저부 형태는 조사지역별로 차이를 보이며, 남서벽(발굴1지점)은 성벽 진행방향으로 계단상 굴착, 일부 정지작업이 확인되었고, 남동벽(발굴2지점)은 진행방향은 계단상, 직교 방향은 ‘L’자 형태로 굴착하였으며, 1차 조사 발굴2구역은 성벽과 직교하는 방향의 사면을 계단상으로 굴착하였다. 외벽은 장방형 및 부정형 할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했으며, 잔돌을 끼워 견고성을 높였다. 면석은 모두 편마암을 사용하였다.
1차 기단보축은 외벽 기저부 보강용으로 전 구간에 구축된 반면, 2차 기단보축은 지형에 따라 부분적으로 설치되었다. 2차 보축부터 천석이 사용되며, 시기적 변화를 보여준다. 수축성벽은 초축성벽이 붕괴된 부분을 보수한 것으로, 완경사에서 급경사로 변하는 지점에 위치하며, 초축성벽과는 시차가 있으나 보축성벽과는 유사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 보축성벽은 1·2차 조사에서 다른 구조물을 지칭하며, 1차 조사에서는 초축성벽과 동일한 석재를 사용한 석축이 확인되었으며, 2차 조사에서는 치밀한 축조법이 확인되었다.
내부시설은 군사시설로 인해 훼손이 심하며, 1차 조사에서 건물지 기단으로 추정되는 석렬 4기와 석축유구가 확인되었으나, 배치에 정형성이 없고 삼국~고려시대 유물이 혼재하여 초축과 직접적 관련성은 낮다.
산성은 그 건축적, 군사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다. 이 산성은 신라의 군사적 기술과 방어 체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로, 당시 신라의 사회와 문화, 군사적 역량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또한, 대전리산성은 신라와 당나라의 갈등과 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 장소로, 현재까지도 그 의미와 가치를 이어가고 있다.
대전리산성은 단순한 고대 성곽을 넘어, 신라와 당나라 간의 격렬한 전쟁과 삼국통일의 중요한 전환점을 상징하는 역사적 장소이다. 이 산성은 신라의 방어 전략과 군사적 능력을 잘 보여주며, 매소성 전투를 통해 신라가 당나라를 물리친 결정적 장소로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대전리산성은 현재에도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으며, 한반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장소로 기억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