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의 길, “분리될 수 없는 띠를 위하여”

  • 기사입력 2025.04.09 08:22
  • 기자명 김국현 수필가, 문학평론가
▲북유럽 발트 연안의 리투아니아 시골 도시인 샤울레이 교외에는 십자가 언덕이 있다. 예수의 십자가상이 중앙 광장에 우뚝 솟아 있고, 그 뒤로 제법 큰길과 여러 갈래의 샛길을 따라 양쪽으로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필자
▲북유럽 발트 연안의 리투아니아 시골 도시인 샤울레이 교외에는 십자가 언덕이 있다. 예수의 십자가상이 중앙 광장에 우뚝 솟아 있고, 그 뒤로 제법 큰길과 여러 갈래의 샛길을 따라 양쪽으로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필자

북유럽 발트 연안의 리투아니아 시골 도시인 샤울레이 교외에는 십자가 언덕이 있다. 아픈 딸의 회복을 바라는 아버지가 이곳에 처음으로 십자가를 세웠다는 설도 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된 군인들의 넋을 기리는 뜻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곳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하루 수천 개의 십자가를 꽂으며 각자의 소원을 빈다고 한다.

발트 3국을 여행 중이던 우리 일행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초여름이라 꽤 무더웠다. 예수의 십자가상이 중앙 광장에 우뚝 솟아 있고, 그 뒤로 제법 큰길과 여러 갈래의 샛길을 따라 양쪽으로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어떤 곳은 십자가 위에 걸쳐 있기도 하고 십자가 그늘 밑에 조그만 십자가들이 모여 있기도 했다. 언덕에 적당한 자리가 없어 그 아래 들판에도 새 터가 조성된 지 오래다. 언덕 정상에 올라서니 눈시울이 뜨거워져 바라보기조차 힘들다. 십자가를 심은 뜻이 각자의 소망을 이루고자 함인가, 오직 하나님을 사모하고 찬양하기 위함인가. 그들의 소원이 너무나 간절하여 나는 오로지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창조주를 경배할 따름이다.

한때 지역 주민들이 십자가 수를 세는 작업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 숫자가 워낙 많아 중도에 포기했다고 한다. 대략 백만 개는 될 거라 짐작만 할 뿐이다. 그처럼 십자가 언덕에는 리투아니아 민족의 꺼지지 않는 저항 의식과 민족정신이 십자가와 함께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와 함께 발트 3국을 구성하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백만 송이 장미>의 원곡은 그 이웃나라인 라트비아에서 나온 것이다. 구소련의 억압에서 벗어나 독립된 나라를 꿈꾸며 지은 곡으로, 원곡 제목은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인생>이다.

가사는 민족을 지키는 신(神) 마리냐가 소녀에게 지혜는 주었지만 해방된 조국 땅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행복을 얻는 방법은 가르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구소련에 대한 라트비아 민족의 저항 의식을 대표하는 곡이다.

그런데 1989년 이곳에서 전 세계인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노래혁명(singing revolution)이 일어났다. 거의 600여km의 도로에 총 200여만 명의 3국 국민들은 인간 띠를 잇고 노래를 부르며 독립을 외쳤다. 이 세기적인 사건은 대다수 국민의 호응을 얻은 점에서 우리나라의 3.1운동과 흡사하다. 세상은 이를 ‘발트의 길’이라 칭하기도 했다.

노래혁명은 에스토니아의 대학도시인 타르투에서 태동했다. 그날은 학교 앞 광장에서 팝 뮤직 페스티벌이 열렸다. 시민들은 장롱 속에 깊이 숨겨 둔 국기를 꺼내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밴드 연주에 맞추어 두 팔을 벌려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젊은이뿐 아니라 노인들과 부모를 따라온 어린아이도 한몫했다. 제목은 <나는 에스토니아 사람이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이었는데, 혁명의 무기는 바로 총칼이 아닌 평화적인 노래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버스킹(busking)의 원조가 아닌가 싶다.

타르투 광장 공연의 대대적인 호응에 힘입어 지역 주민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성격인 노래혁명으로 이어가자는 결정을 하게 된다. 마침내 이 계획은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을 비롯하여 다른 도시로 전파되었고, 마침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에까지 확대되었다.

행사 내용은 3개 국가의 수도를 지나는 도로를 인간 띠로 잇고 다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행사 당일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군중들이 수십 또는 수백 킬로미터를 걷거나 차를 타고 ‘발트의 길’로 모여들었고, 도로 전체를 손에 손을 잡은 사람들로 이어갈 수 있었다. 대회는 성공적이었다. 참가자들은 독립을 위한 강렬한 의지로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는/ 분리될 수 없는 띠를 위하여/ 길 위에 나란히 서 있습니다/ 일어나라 발트 국가여/ 일어나라 발트 국가여 (중략)

이 행사가 개최된 다음해인 1990년, 개혁 개방 정책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소련이 붕괴되자 발트 3국은 1991년에 완전 독립을 선언했다. 그 당시 이 혁명에 동참하고자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역에서 판문점까지 통일을 염원하는 인간 띠 행사를 한 적이 있다.

발트 3국은 독립된 지 불과 30여 년이 지났지만 국민소득이나 경제 수준으로 보아 중진국 이상의 위상을 누리고 있다. 그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단합된 국론과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자리 잡은 나라 사랑 아니겠는가. (전 한국지방재정공제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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