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즐기는 자의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순간만이 있다. 지난날의 후회나 내일에 대한 불안감 같은 건 들어설 틈이 없다. 오직 한 가지. 좋아하는 걸 선택해 마음껏 즐기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그러기에 이곳 고척돔 구장은 자유로운 영혼들의 안식처다.
응원하다 목이 쉰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학창 시절 동대문 야구장에만 다녀오면 다음 날은 여지없이 목이 쉬었다. 좋아하는 투수와 타자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교 사랑이 가슴을 뛰게 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다 경기가 끝나면 운동장 밖 길거리에서 친구들과 어깨동무하며 구호를 외쳤다. 승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편 타자가 삼진 아웃이라도 당하면 응원석은 들썩거린다. 기다렸다는 듯이 “빠이빠이야” 하며, 자기편에는 힘을 주고 상대편에게는 힘을 뺀다. 팀이 수비하는 동안에는 박수 소리나 탄성만 들리다가 공격 순서가 되면 응원이 되살아난다. 웅크리고 있던 사자가 일어나 포효하듯이. 박자에 맞는 율동과 떼창은 하는 이나 보는 이나 모두 즐겁다. 선수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희비가 엇갈리지만 절대 포기라는 건 없다. 팀과 선수들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끝까지 간다. 가슴에 옹그린 젊은 영혼들의 웅성거림은 이곳 경기장에서 감동과 환호로, 탄식과 아쉬움으로 승화된다.
경기장에는 여성들도 힘이 넘쳐난다.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는 남성들인데, 관중석 여성들의 응원 소리가 돔구장 천장까지 가 닿는다. 그 안에 듬성듬성한 남자들의 외침은 여자들 함성 속에 묻혀 스멀거린다. 진정 좋아하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감정 표현은 솔직하면서도 거침이 없다. 그들이 합심하여 질러대는 함성은 쇠붙이라도 뚫을 기세다. 현대판 우상은 있으나 개인숭배는 없다. 팬심의 위력은 모든 걸 수용하고 용서한다.
마운드를 사이에 두고 두 팀으로 나누어진 응원은 때로는 듀엣으로 때로는 솔로가 되어 이어진다. 승패도 없는 번외 경기의 현장이다. 그 흔한 곡조 하나 없어도 리듬과 율동과 함성만으로 훌륭한 음악이 된다는 걸 그들은 증명해 보인다. 춤을 곁들인 힙합이 그렇고, 북과 장구와 꽹과리로 구성된 사물놀이패들의 장단이 그랬다. 선율이 없는 박자와 자유로운 몸짓은 늘 최선의 음악이고 예술이었다.
수없이 이어지는 시행착오와 연습의 결과가 선수들의 장갑과 방망이에서 재현된다. 하늘 높이 치솟는 공을 잡는 순간 그 희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방망이 소리는 경쾌하다 못해 천지를 울린다.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르고 타자는 온 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린다. 네모난 운동장은 바람개비처럼 돌고 돌아 땀으로 얼룩진다.
응원석의 소망은 오직 하나다. 율동과 환호성 속에는 팀의 승리만이 있다. 팀과 응원단이 한 몸이 되어 움직인다. 함성은 허공을 날지만, 마음은 선수들의 몸동작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다. 이 순간만큼은 젊은 세대들의 현실적 고뇌는 없다. 아니, 있다 해도 모든 걸 쓸어 담아 몸짓과 함성 속으로 날려버린다.
선수에 따라 응원 구호도 다르다. 어떤 선수에게는 홈런이나 안타를, 어떤 선수에게는 도루나 병살타를 기원한다. 설사 최종 승리는 하지 못해도 실패는 없다. 단지 조금 모자랄 뿐이다.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도 낙오자 없이 한 팀으로 훈련된 응원단이었다. 리더의 선창이나 치어걸의 율동이 시작되면 모든 이들은 한마음이 된다. 나도 곁눈질로 몸짓을 따라 하고 환호성도 질러보았다. 하지만 아직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건 나이 탓일까, 팀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탓일까.
결과는 5대5 무승부였다. 치고 달리는 연장전에도 승부는 가려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승부는 무승부다.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 중에 ‘우분트UBUNTU’라는 미담을 실천한 것인가. 어느 한 팀이 승리했다면 상대방 팀의 상실감이 너무나 크기에 승리의 여신은 모두의 승리로 장식했다. 푸른색과 노란색으로 채색한 응원단의 함성만 돔구장 천장 조각들 하나하나에 아로새겨졌다.
경기장 밖에서 한 무리의 젊은 여성들을 만났다. 지방에서 올라온 열성팬들이었다. 열차 시간이 임박해 마음이 급해도 표정만은 즐겁다. 좋아하는 팀과 선수들을 응원했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뿌듯함이다. 선수들의 땀방울에 대한 작은 성의요 보상이다. 야심한 시각이지만 그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해 주었다.
돌아가는 길목에서도 방망이 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이제 나도 프로야구 마니아가 되어가고 있다./김국현 전 한국지방재정공제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