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길' 치유센터…하루가 또 그렇게 저물어 간다

  • 기사입력 2025.06.08 11:39
  • 기자명 김국현 수필가, 문학평론가
▲환우들은 예전에 무슨 일을 했고 어디서 어떤 집에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고향을 물어보고 친근감을 느껴보는 정도다. 서로의 심정을 이해하니 누구랄 것 없이 먼저 인사하고 금세 친해진다. 필자 제공
▲환우들은 예전에 무슨 일을 했고 어디서 어떤 집에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고향을 물어보고 친근감을 느껴보는 정도다. 서로의 심정을 이해하니 누구랄 것 없이 먼저 인사하고 금세 친해진다. 필자 제공

옆방의 환우가 항암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갔다. 이른 아침 듬직한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러 왔다. 아내는 종일토록 방을 지키다가 저녁 무렵 식당에서 밥상을 차려 방으로 들였다. 온 식구의 하루는 가장의 아픔을 나누며 긴장 속에서 지나고 있었다.

낙엽이 흩날리는 늦가을 주말 오후, 나는 피곤한 몸도 추스를 겸 한적한 시골의 치유센터에 들어와 자연 속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풀벌레 소리 잦아든 숲속 작은 방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어스름 새벽이 밝아 오자 스피커에서는 여지없이 기상 시간을 알린다. 아바(Abba)가 부른 'I have a dream'의 가락에 맞추어 환우들은 하나둘씩 잔디광장으로 모여든다. 아픈 이들에게 꿈이란 고귀한 생명을 보존하려는 이상이다. 아침 체조를 하면서 몸속의 독소를 빼내고 기운을 북돋운다.

식당에는 떠드는 사람 하나 없다. 대화를 즐기는 사람도 분위기에 억눌려 소곤거리며 눈치만 살필 뿐이다. 환우들은 하나 남은 나뭇잎까지 떨구어낸 겨울 산의 백합나무처럼 고통과 분노와 원망 모두 다 내려놓았다. 오직 소생과 완치의 기적을 기대하며 한술 입에 넣고 무던히 잘게도 씹는다.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잊어버릴 정도이다.

비행기가 하늘 높이 날다가 자욱한 흔적만 남기고 산 너머로 사라진다. 남은 기운을 살려 꺼져가는 불꽃을 피우려는 환우들의 힘겨운 몸부림이 애처롭다. 명상과 기도, 풍욕과 운동, 스파와 온열치료가 형편 따라 잠잠히 이어진다. 그들에게 이곳은 세상 끝자락에서 만난 구세주와 다름없다.

나도 그들 속에 어울려 아침 산행길에 나섰다. 하늘을 오르는 한 아름 편백나무를 품에 안아본다. 소리가 들린다. 나무가 내게 하는 소리인지, 내 영혼에서 나는 소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산행길은 곳곳이 토론장이다. 가까운 이들과 동행하며 한 발짝씩 떼어 하루를 걷는다.

긍휼과 위로를 주고받으며 정보도 얻고 몸도 상쾌하니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다. 산림욕장에 모인 사람들은 한차례 맨발 걷기로 땅의 기운을 얻은 덕분에 나무 벤치에 마주 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수술과 항암 치료를 이겨낸 환우는 마치 개선장군 같다.

암 종양은 그들에게 품고 살아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싫든 좋든 친구처럼 지내야 한다. 이곳에서는 병력(病歷)이 자랑이다. 환우들의 체험담은 뭇사람의 세상 돌아가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한 편의 드라마요, 잔인하지만 따뜻한 인생 스토리이다.

상대방의 상태를 궁금해하면 너나없이 자신의 숨은 이야기를 옷깃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처럼 죄다 털어낸다. 그러기에 여기는 위로가 있고 정이 넘친다. 웃고 떠들면서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를 즐긴다.

서른 번의 항암을 한차례 끝내고도 암이 재발하여 두 번째 항암 치료를 앞둔 사람과, 간 종양을 제거한 지 석 달 만에 암세포가 전신에 퍼진 환우도 있고, 췌장암 수술을 어렵게 마치고 예후가 좋다고 환하게 미소 짓는 이도 있다. 모두 한결같이 자연치유로 면역력을 키우려는 기대가 남다르다.

이곳은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다. 그냥 아픈 사람만 있다. 건강한 사람이 간혹 끼어있지만, 환자를 보살피러 온 가족이다. 마음 아프고 심신이 고단해도 같이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환우들은 예전에 무슨 일을 했고 어디서 어떤 집에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고향을 물어보고 친근감을 느껴보는 정도이다. 서로의 심정을 이해하니 누구랄 것 없이 먼저 인사하고 금세 친해진다.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병 앞에서는 겸손해진다. 세상사에 관심 가지다 보면 관계가 어긋나고 거짓과 원망으로 상처받기 쉽지만, 몸이 아프면 달라진다. 이곳에는 치료, 음식, 운동, 마음 관리 등 온갖 건강 정보가 살아서 움직인다.

어느 것 하나 투병 생활에 유익하지 않은 게 없다. 새로운 환우가 들어오면 앞장서 멘토가 되어 상태를 물어보고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여기가 바로 사람 사는 곳이다. 약하고 힘든 상황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식당 앞에는 〈십자가의 길〉로 명명한 산책길이 있다. 예수의 마지막 생애를 위안 삼아 환우들은 힘을 얻는다. 칠십 대 환우 한 사람이 십자가 앞에 서서 기도문을 외운다. 하루해가 저물어온다. 밤하늘에서 어두움이 소리 없이 내려오면 한 줄기 바람도 나지막이 고개를 숙인다.

옆방에 두런거리는 소리가 난다. 남자가 돌아왔나 보다. 방 안에 잠시 생기가 돌다가 밥 먹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하다. 반쯤 부풀어 오른 달은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데, 하늘 저편에 뜬 별들이 졸리는 듯 깜빡거린다. 긴 하루가 또 그렇게 저물고 있다. /전 한국지방재정공제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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