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8월 초순에 내가 회장으로 있는 화랑대 문인회 일로 사무총장과 통화 중에 느닷없이 ‘강재구소령선양사업회’를 창립하려는데 내게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간청하는 일이 있었다. 사무총장은 고(故) 강재구 소령(육사16기)이 다녔던 인천의 창영초등학교 출신이자 육사 후배(38기)의 인연까지 있는 걸출한 호국 시인이다.
그는 유달리 강재구 소령의 영웅성을 추앙하던 차에 강재구 소령 순직 60주기를 맞이하여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선양사업회를 구상해 낸 것이다. 사무총장은 내가 월남전 참전 경험이 있고, 나라와 사회에 봉사하는 일은 웬만해서는 마다하지 않는 나의 성품을 잘 알고 있어, 급한 마음에 불쑥 말을 던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강재구소령선양사업회’ 이사장직을 맡기에는 그분과의 인연이 너무 엷다고 느꼈다. 나는 강재구 소령이 인천 출신이고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이 기억나서 언뜻 국방부 차관을 지내신 육사17기 선배님이 같은 중·고등학교 출신이라고 들은 것 같아 그분을 모셔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사무총장은 차관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정말 같은 인천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를 1년 차이로 따라 다녔고, 육사마저 뒤를 이었을 뿐 아니라 고인과도 가까운 사이였다며 기꺼이 이사장직을 수락하셨다고 한다. 이사장을 제대로 추천한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워졌다.
몇일 후 9월 중순경에 강재구 소령이 다녔던 인천 창영초등학교에서 창립 총회를 열 예정이라고 하니 나는 당연히 후원이라도 해야 그분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표하는 것이 되리라. ‘강재구소령선양사업회’가 창립되어 과거사에 머물지 말고 국민들에게는 안보의식을 고취시키며 오늘날 참전 경험이 없는 후배 장병들에게는 전승(戰勝)의 길라잡이가 되어줄 것을 기대한다.
고(故) 강재구 소령은 맹호사단 중대장(당시 대위)으로 1965년 10월 4일 파월 준비 중, 수류탄 투척 훈련 시 한 부하가 앞으로 던지려던 수류탄을 놓치는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안전핀이 뽑힌 채로 손에서 떨어진 수류탄은 중대원들이 대기하고 있는 구역으로 굴러갔다. 그 순간 강대위는 위기에 처한 부하들을 구하고자 망설임없이 수류탄 위로 몸을 덮쳐 산화하시고 백 여명의 부하들을 구했던 살신성인의 진정한 영웅이셨다.
강대위는 육사의 교훈인 지인용(智仁勇)과 안중근 의사의 정신인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견리사의 견의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라)’을 실천에 옮기신 참 군인이셨다.
당시 정부에서는 강재구 대위의 영웅적 희생을 기리기 위해 1계급 특진을 추서하였고 태극무공훈장을 서훈하여 그의 살신성인의 위대한 희생을 기렸다. 이듬해에는 육군 전 장병들의 헌금으로 육군사관학교 화랑연병장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언덕의 국기게양대 옆에 강재구 소령의 동상이 세워졌다. 육사 생도들은 열병식을 할 때마다 동상 앞을 지나며 경례를 하고, 졸업식 때에는 받은 꽃다발을 동상에 걸리도록 던지면서 “선배님처럼 살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전통이 생겼다.
그리고 육군은 강재구 대위가 복무했던 보병대대를 ‘재구대대’로, 강재구 생도가 생활하던 육사 생도대 제2중대를 ‘재구중대’로 명명(命名)하였다. 또한 1966년부터 전군에서 매년 군단급 부대별로 우수중대장을 선발하여 총 14명에게 재구상을 수여하고 있다.
강재구 소령의 영웅성은 군에서 뿐 만 아니라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의 교정에도 흉상이 건립되었고, 홍천의 재구공원에도 있다. 1960년대 후반 최고의 배우들인 신성일과 고은아가 열연한 영화 ‘소령 강재구’(각본 신봉승)가 제작되어 상영되었으며, 홍천군의 산화 현장에 강재구소령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국민적인 살신성인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군이 건국 이후 역사적으로 첫 해외원정인 월남전에 파병하여 세계 만방에 용맹을 떨친 것은 바로 강재구 소령의 ‘위국헌신 견위수명’ 정신을 장병들이 계승하였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가 월남에서, 그리고 그 후 미국과 한미연합사에서 만난 미군들은 한국군의 용맹성에 혀를 내둘렀다. 한국군의 월남 참전은 한미동맹 강화와 한국군 발전 및 대한민국 부흥을 위한 신의 한 수였다.
나의 육사 동기생(21기)들은 강재구 소령이 순직하신 1965년에 임관을 했기 때문에 대부분 휴전선 전방부대에 소대장으로 부임했다가 다음 해인 1966년부터 월남전에 참전하기 시작했다. 나의 동기생들은 주로 소대장으로 참전해서 용맹스럽게 전투지휘를 하다가 7명이나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전상(戰傷)을 입은 숫자는 더 많았다. 그런 희생들이 발생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들은 모두 월남전에 참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육사 1기부터 10기 까지는 6.25전쟁에 참여하여 조국을 지킨 역전의 용사세대이다. 월남전에는 위관 및 영관장교로 육사 11기(전두환 대통령 동기)부터 27기(71년도 임관)까지 참전할 수 있었다. 전체 인원 3,037명의 약 70%인 2,069명이 자원해서 참전했다는 것은 역시 강재구 소령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나는 소위시절 전방으로 부임하자마자 얼마되지 않아 신생(新生) 방공유도탄 부대요원으로 차출되는 바람에 미국 방공포병학교 유학 등의 사유로 대위가 되어서야 비로소 월남 참전의 기회를 가졌다. 1970년 월남 참전 명령을 받은 후 육군사관학교에 우뚝 서있는 강재구 소령의 동상을 찾아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실전에 임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했던 기억이 새롭다. 강재구 소령의 정신은 용맹스러웠던 월남전 한국군 신화의 근원이었다.
무엇보다도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된 전 국방차관께서 고(故) 강 소령과의 깊은 인연과 탁월한 경륜을 바탕으로 이 선양사업회를 훌륭히 이끌어주실 것으로 믿는다. 강재구 소령의 숭고한 정신을 올곧이 계승하고 널리 알리는 데 있어 그보다 더 적임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