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장남 이지호 씨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15일 해군 장교로 입대해 화제가 되고 있다.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과 미국 복수 국적을 가지고 있던 이씨가 돌연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면서까지 해군에 입대한 데 대해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이는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公共)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초기 로마 사회에서는 사회 고위층의 공공봉사와 기부·헌납 등의 전통이 강하였고 이러한 행위는 의무인 동시에 명예로 인식되면서 자발적이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귀족 등의 고위층이 전쟁에 참여하는 전통은 더욱 확고했는데 한니발(Hannibal)이 카르타고(Carthago)와 벌인 16년간의 제2차 포에니전쟁 중 최고 지도자인 콘술(consul 집정관)의 전사자 수만 해도 13명이나 됐다고 한다.
로마 건국 이후 500년 동안 원로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15분의 1로 급격히 줄어든 것도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귀족들이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귀족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할 수 있었으나 제정(帝政)이후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되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면서 발전의 역동성이 급속히 쇠퇴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도덕의식은 계층 간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전쟁과 같은 총체적 국난을 맞이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득권층의 솔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 칼리지(Eton College)’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 전쟁 때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루(Andrew)왕자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6·25전쟁 때에도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당시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James Award Van Fleet)의 아들은 야간폭격 임무수행 중 전사했으며 대통령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의 아들도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다.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 Mao Zedong)의 아들도 6·25전쟁에 참전해 전사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 가운데 5,099명이 사망했으나 그 가운데 장.차관이나 권력층 자녀는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현재 22대 국회도 여성 의원을 제외(국민의힘 강선영 의원은 육군 소장 출신)한 남성의원 242명 중 42명(17.6%)이 병역을 면제받아 군 복무를 안 한 것으로 파악되는 등 이른바 사회 지도층의 병역 면제 비리가 여전히 우리 사회의 논란거리다.
재계에서도 LG구광모 회장(산업기능요원으로 대체 복무)과 한화 김동관 부회장(공군 장교)은 병역의무를 이행했으나 삼성 이재용 회장(허리디스크 수술)과 현대차 정의선 회장(담낭절제술 이력) 정용진 신세계 회장(과체중) 등도 석연치 않은 이유 등으로 병역 면제를 받아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은데 이번에 삼성 가계의 이지호씨가 군 복무에 나서 남다른 눈길을 끌고 있다.
물론 재계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이미 10여 년 전인 지난 2014년에 SK그룹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의 차녀 최민정 씨가 해군 장교로 입대해 남자 훈련생들도 탈락할 만큼 혹독하다는 훈련도 견뎌내고 당당히 해군 소위로 임관된 후 입은 군복과 계급장이 유난히 돋보였던 기억이 있다.
그것에 이어 훗날 기업 승계에 따른 포석 등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겠지만 이번에 대한민국 최고 재벌이자 세계적인 삼성가의 장남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안가고 못간 군대를 입대하면서 또 하나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고 있다고 보는 게 결코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 같다.
로마 천년을 지탱해 준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갈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