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길과 '여해나루': 아산이 품은 역사와 사색의 공간

아산 은행나무길, 기억과 현재를 잇는 길

  • 기사입력 2025.09.26 21:53
  • 최종수정 2025.09.26 21:58
  • 기자명 박소영 역사·외식문화 칼럼니스트
▲ 가을 명소인 아산 은행나무길.
▲ 가을 명소인 아산 은행나무길.

가을이 깊어질수록 충남 아산의 곡교천을 따라 이어진 은행나무길은 황금빛으로 물든다.

이 길은 현충사 충무교에서 현충사 입구까지 약 2.1km를 잇는 산책로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색채와 풍경을 느끼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곡교천을 따라 은행나무길을 산책하며 사색하는 아산의 대표적인 명소다.

은행나무길은 단순히 아름다운 가로수길이 아니다. 1966년 정부가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도로가 정비되었고 1973년에는 10여 년생 은행나무 약 350그루가 심어지면서 오늘의 숲길이 조성되었다.

은행나무는 동아시아에서 ‘장수와 강인함’을 상징해왔고 마을과 사찰의 수호목으로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녀왔다.

아산의 은행나무길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이 땅이 품어온 역사와 정신을 상징하는 시간의 숲이다.

길 끝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가 있다.

현충사는 1706년 창건되어 이듬해 '현충사(顯忠祠)'라는 사액을 받았고 일제강점기의 퇴락을 거쳐 1932년 중건, 광복 이후 1966년 국가 주도로 대대적인 성역화가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현충사를 위한 나무를 헌납하자"는 범국민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충사의 창건과 은행나무길의 조성이 같은 맥락 위에 있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산은 이순신 장군의 고향이자 영면의 땅이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 중 전사한 뒤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남해 충렬사 뒤편에 모셨다가 16년 후 1614년에 아산 음봉면으로 이장되어 오늘날까지 묘역이 보존되고 있다.

묘역에는 신도비와 문인석이 자리하고 있으며, 1644년에는 인조(仁祖) 임금이 이순신에게 ‘충무공(忠武公)’ 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충무공 묘소는 오늘날 국가 지정 사적으로 관리된다. 이순신 장군은 국난 속에서 백성을 먼저 생각하며 스스로를 불살랐고 아산은 그 정신을 품은 도시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26일 이순신관광체험센터 '여해나루'가 개관했다.
▲26일 이순신관광체험센터 '여해나루'가 개관했다.

9월 26일 은행나무길 옆에는 이순신관광체험센터  '여해나루'가 개관했다. 

'여해(汝諧)'는 이순신 장군의 자(字)이고 ‘나루’는 센터가 위치한 곡교천 지역의 나루터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것은 이충무공의 정신이 흐르는 역사적인 공간과 시민들이 만나는 지점을 의미한다.

이곳은 신화 속 영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조명하는 공간이다.

디지털 페인팅과 미디어 아트를 통해 '오늘날의 이순신은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게 하며 백성을 향한 책임과 고뇌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을 주고 있음을 일깨운다.

또한 아산의 주요 관광지와 역사를 연결하는 미디어 아트 전시를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아산 지역의 정체성을 새롭게 풀어내고 있다.

아산의 은행나무길은 단순한 가을 명소가 아니다. 수십 년 전 심겨 오늘날 숲이 된 은행나무는 아산의 굳건한 생명력을 상징하며 현충사와 이충무공 묘소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국민들을 수호하는 이순신 장군의 굳건한 책임감을 상징하여 우리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전한다.

그리고 '여해나루'는 그 정신을 현재의 언어로 되살린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길을 따라 걸을 때 느껴지는 경건함은 결국 이 도시가 품어온 역사와 백성을 살리고자 힘썼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예의다.

아산은 지금도 묻는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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