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선반에 오래된 책이 한 권 꽂혀 있다. 검은 표지는 낡고 헤져서 접힌 자리에 속살이 드러나 있다. 송나라 주자가 쓴 《소학(小學)》이다. 내가 책을 좋아하고 글 쓰는 일을 즐기기에, 아버지는 내게 다른 어떤 것보다 책을 남기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는 병석에 계셨다. 집으로 모시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이 살던 옛집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형제들이 다시 그 집에 모였다. 부모님의 유물이라야 책과 옷가지, 이불, 부엌살림이 전부였다. 검소하고 단정한 두 분의 일상이 눈앞에 되살아났다. 나는 그 속에서 빛바랜 《소학》 한 권을 골라 신문지에 싸서 집으로 가져왔다.
며칠 전, 불현듯 그 책이 궁금해졌다. 간밤에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니 곳곳에 붉은 볼펜으로 줄이 그어져 있고, 여백마다 친필 메모가 남아 있었다. 종이가 낡은 탓에 글씨가 조금씩 번져 있어 읽기가 쉽지 않았다.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주석해 둔 것으로, 그냥 읽어 내려간 게 아니라 공부하신 흔적이었다.
아버지는 책 속에 여전히 살아 계셨다. 아버지의 숨소리와 함께 천천히 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연히 펼친 곳은 ‘가언(嘉言) 28장’이었다.
사람이 부모가 없으면 자신의 생일에 마땅히 슬픈 마음이 배나 더할 것이다. 다시 어찌 차마 술잔치를 벌이고 음악을 연주하며 즐길 수 있겠는가. 만약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존하 였다면, 자신의 생일에 그렇게 하여도 좋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 구절에 줄을 그어 두셨다. 그 뜻을 헤아리자 가슴이 먹먹했다. 부모의 은혜를 잊지 말고, 늘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하신다. 아버지는 고향의 문화원과 대학에서 유학을 가르치신 분이다. 그럼에도 나이 들어 《소학》을 읽으신 것은 유학도로서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함이라 짐작해 본다. 다른 장을 펼쳤다. ‘경신(敬身) 36편’의 말씀이다.
目不視惡色 耳不廳惡聲(목불시악색 이불청악성)
눈으로 악한 빛을 보지 말고 귀로 악한 것을 듣지 말라
보고 듣는 것을 신중히 하여, 항상 선한 마음을 갖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뜻이 아니던가. 자애로운 분이라 생전에는 잔소리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제 장성한 자식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주고 계셨다. 책 뒷면의 출판연도를 보니, 아버지가 지금의 내 나이 무렵에 이 책을 구입하신 것이었다. 책은 분명 세월을 넘어 아버지와 나를 잇는 다리였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여러 장면이 겹친다. 시골 역의 플렛폼에서 역무복을 입고 서 계시던 모습, 정부 표창을 받던 날의 미소, 방송에서 유학을 강의하시던 목소리, 사군자를 그리던 손끝의 섬세함. 말수가 적으면서도 농담을 즐기셨고, 내가 집에 있는대도 놀러 온 친구에게 “너 집에 갔다”고 장난치시던 기억이 새롭다. 내 어릴 적 들려주시던 황새와 까치 이야기는 이제 내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낡은 책을 가슴에 안고 조용히 속삭인다.
“아버지, 용서하십시오.”
어릴 때 자전거를 잃고도 솔직히 고백하지 못한 일, 어머니를 유택에 모신 뒤 소식을 바로 전해드리지 못한 일, 병상에 계실 때 그토록 가고 싶어 하셨던 집으로 모시지 못한 일…. 그 모든 순간에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내 삶을 늘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셨다. 공직에 들어섰을 때, 중앙청 홀에서 합격증을 받던 내 모습을 보시며 어머니와 함께 미소 지으시던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날의 뿌듯함이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왔다. 내 이름에 ‘국(國)’자를 넣으신 것도 아마 그런 뜻이었으리라.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내 마음의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이다. 삶이 힘겹고 흔들릴 때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천천히 가라, 바르게 살아라.” 작은 데서 원대한 꿈을 꿀 수 있는 용기, 자연을 벗 삼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선비의 자세, 당신의 큰사랑으로 내가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아버지가 남기신 소중한 유산이다.
나는 양지바른 창가에 아버지의 자리를 마련하고, 당신이 즐겨 그리시던 난초 한 그루를 올려놓는다. 어느 겨울날 그 난초에 꽃이 피면 아버지의 빈자리에 앉아 《소학》을 펼쳐 읽으리라. 아버지의 책이 들어 있는 옷장 문을 열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전 한국지방재정공제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