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지 않은 지 두어 달이 지났다. 게으른 내 잘못은 탓하지 않으면서 하릴없이 지나는 하루해가 야속하기만 했다.
모처럼 쓸 거리가 생각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금세 잡생각에 휘말려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그려지지 않은 채, 사유의 길은 매번 제자리에서 헛돌기만 한다. 그러다 유튜브 채널이나 관심 있는 블로그를 찾아다니며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생각이 게으른 자의 표본인가. 마치 내 안의 내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이러고도 나는 작가라 할 수 있는가. 글을 쓰지 않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세상은 ‘하고 있는 일’로 사람을 정의한다. 작가는 글을 써야 한다. 농부는 밭을 갈아야 하고 어부는 그물을 던져야 한다. 글을 쓰지 않는 한 어쩌면 더 이상 작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멈추고 있었기에 때로는 자책이 되고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어느 날 문득, 이 시간이 무의미한 정체가 아니라 ‘삶의 쉼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장이 멈추는 곳에 쉼표가 있듯, 인생도 잠시 멈춰야 비로소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다. 매사에 성취하려는 의욕이 넘쳐 쉼 없이 달려가다 보면 일에 얽매이고 생각의 노예가 될 뿐이다.
아침 일찍 회의가 있어 승용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출근 시간과 맞물려 도로가 주차장이었다. ‘아차, 고속도로로 가면 안 되는데….’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마침 라디오에서 귀에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의 〈Sometimes When It Rains〉이다. 작은 공간을 가득 메우는 바이올린 소리는 매혹적이었다. 같은 곡조를 반복하며 유유히 흘러가는 리듬에 내 생각을 내려놓았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노래 한 곡 덕분에 여유를 가졌다.
앞만 보며 매사에 열심인 것만이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 며칠 전 친구가 “게으름이 옛 부엌 그을음같이 진득하게 달렸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대뜸 “참 잘하네”라고 화답해 주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가끔은 진득한 게으름을 부려보는 것도 괜찮다. 그것은 무기력이 아니라 삶을 더 깊이 음미하려는 의식적인 멈춤이다. 그 게으름의 여백 속에서 우리는 진짜 나 자신을 마주한다.
이번 주 교회 목사님의 설교 제목이 〈쉼표의 비밀을 아시나요?〉였다. 말씀 중에 슬픔과 시련도 하나님이 주신 쉼표라는 대목에 위안을 얻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 인생에 쉼표를 찍어 멈추게 하십니다. 질병과 역경을 통해 쉬게 하십니다. 잠시 멈춤은 재충전의 시간입니다. 상처와 실패로 여겨졌던 시간은, 사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찍어주신 거룩한 쉼표였습니다. 그 쉼표는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이고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재창조의 기회입니다.
쉼표의 시간은 성숙과 성장의 기회다. 고난과 절망의 시기에 찾아올 때 그 선한 영향력은 더욱 값지다. 더욱이 생각의 멈춤은 타성과 나태의 결과가 아니다. 바쁜 일상을 쉬게 하는 숨 고르기일 뿐이다. 침묵 또한 나의 문장이고 서사이다. 때가 되면 다시 쓰게 될 것이고, 설령 쓰지 않는다고 실망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그건 단지 행위에 대한 정의일 따름이다. 존재의 본질은 그 너머에 있다. 침묵의 시간에도 난초의 새순에 감탄하고 붉은 장미에 매혹된다면 글을 쓰기 위한 몸짓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처럼 삶도 멈춰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때부터 계절의 변화를 눈여겨보는 습관이 생겼고 구름과 별들의 속삭임을 들었다. 창가로 스며드는 산들바람 소리,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표정, 길가에 피어난 들꽃까지 모두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글쓰기가 안 되는 날은 억지로 문장을 채우려 애쓰기보다 차라리 내 안에 빈자리를 만들어두는 편이 낫다. 때로는 일부러 멈춰 서 있기도 한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온기를 오래도록 느끼기도 하고 저녁노을이 창밖을 물들이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한다. 삶은 크고 작은 서사로 채워나가다 결국은 마침표로 끝나는 것이니, 그 사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건 나 자신을 돌아보며 일구어낸 일상의 쉼표들이다.
오늘도 나는 마음 한편에 살며시 쉼표 하나 찍는다. 작은 침묵이든, 깊은 숨이든, 언젠가 그 자리에 아침 햇살처럼 반짝이는 착상이 피어날 것이다. 삶은 그렇게, 잠시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나는 지금 어디쯤에서, 어떤 쉼표를 찍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쉼표 너머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전 한국지방재정공제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