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상의 고객 폭언이나 성희롱을 비롯해 심지어 욕설까지 내뱉는 상황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악성 고객들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는 자존감 하락, 우울감과 무기력, 수면장애와 공황발작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악성 고객으로부터 시달리고 있는 이들을 우리는 ‘감정 노동자’라고 부른다.
사무금융우분투재단이 지난 9월 12일 개최한 '콜센터 노동자의 마음건강 실태조사' 발표 토론회에서는 한 감정 노동자가 “뇌를 씻어서 다시 집어 넣고 싶을 정도로 두통이 심했다“는 증언이 나와 충격을 줬다.
이런 감정 노동자의 마음을 대변해 노래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
<한국NGO신문>은 지난 7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교육원에서 라이나손해보험 콜센터 박은영 지부장을 만나 감정 노동자의 실태와 어떻게 노래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 들어봤다.
황당한 요구에 생트집까지...악성 고객에 상처받는 감정 노동자들
박은영 지부장은 2023년도에 지부장에 당선됐다. 이전에는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지만 지부장이 된 후 더 감정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부분에 마음을 쓰게 됐다. 15년이 넘게 콜센터 노동자로 일하면서도 이전에는“원래 그래야 했었나보다”라는 생각이 더 많았다고 한다.
박 지부장은 콜센터 악성 고객의 사례를 기자에게 설명해 줬다.
“어떤 고객은 통화 상담 내용이 마음이 들지 않으면 5분 뒤에 전화해, 10분 뒤에 전화해 이런 식으로 전화를 걸게 하던가, 그 전화가 1~2분이라도 늦으면 그것을 또 트집 잡아서 관리자를 바꾸라고 생 난리를 치는 경우도 있어요”
어떤 고객은 상담사가 전화를 하면 아무 응답이 없어 전화를 끊으면 바로 전화를 걸어 “왜 전화를 끊느냐”며 항의하기도 하고 어떤 고객은 “너희 때문에 정신적 피해 입었으니까 상품권이라도 달라”는 식으로 금품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는 콜센터에 있는 그런 고질적인 현상 같다고 박 지부장은 설명한다.
“블랙 컨슈머(Black consumer) 등록 제도가 있지만 여기에 등록하는 사람은 심하게 욕을 하거나 성희롱 등 심각한 사람을 등록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전화 자체를 못 걸게 하는 것은 아니죠. 매뉴얼도 있지만 이런 고객은 전화번호를 바꾸거나 휴대폰을 바꿔서 하는 경우도 많다고 보입니다”
성희롱과 인격적 모독에 방치된 콜센터 노동자...전국적으로 수십만명으로 추산
박 지부장은 이런 악성 고객 문제는 감정 노동자 대부분이 여성이라는데에 원인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여성 상담사가 60명이라면 남성 상담사는 5~6명 이라는 것.
“예전에 홈쇼핑 상담사분을 만났을 때 그분이 새벽에 여자 속옷 광고를 많이 하는데 남성분이 전화해서 ‘내 와이프 속옷을 사주려고 하는데 너(상담사) 신체 사이즈가 어떻게 되냐’고 물어 봤다는 거예요. 또 ‘당신 목소리가 예뻐서 사주고 싶다’ 그런 말도 하는 고객이 있다고 해요”
욕설과 성희롱도 문제지만 인격을 무시하는 경우도 심각해 보였다. 어떤 고객은 상담사에게 “너가 (상담을) 그렇게 밖에 대답을 못하니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너 대학은 졸업했어? 고등학교는 졸업했어?” 그런 식으로 인격을 모독하는 발언도 서슴치 않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전국에 이같은 콜센터 감정 노동자들은 40만명쯤 될 것이라고 추산된다. 통계청이 지난 2022년 발표한 콜센터 및 텔레마케팅서비스업 산업분류상에는 종사자 수가 8만여명으로 집계됐지만 실제 상담사 직군을 폭넓게 포함하면 40만에 이를 것이라는 것이 업계의 통념이다.
회사는 콜센터 상담사들을 보호해 주고 있나?
“콜센터 상담사들의 70%가 비정규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상담사 같은 경우는 하청 구조이기 때문에 원청에서 요구하는 수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수치를 못 맞추면 도급비가 깎인다, 뭐가 깎인다 그러기 때문에 참고 일하는 경우도 있죠”
이들에 대한 인권 침해와 악성 고객들의 횡포는 거의 다 비슷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들을 보호하는 사측의 노력은 미흡해 보인다.
지난 10월 9일 KBS는 ‘쿠팡이 준 패널티 540만원…상담원이 다 물어내라?’는 보도를 한 적이 있다. 쿠팡의 한 하청업체 소속 콜센터 상담사가 고객 폭언 등을 겪은 후 이를 SNS에 올린 것에 대해 페널티 통보를 받았고 이에 대해 취재가 시작되자 하청업체는 경고성이었다고 할 뿐이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기사에서는 콜센터 상담사들이 고객으로부터 한달에 평균 11.6회 폭언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내용을 전했다. 업무상 회사가 콜센터 상담사들을 보호해주지 못해 벌어진 측면도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저희는 말은 정규직인데 3년이나 4년, 5년에 한번씩 원청이 회사 하청을 바꿀 때마다 우리는 원청은 똑같은데 명칭만 바뀌는거죠. 어떤때는 어디 소속, 어떤 때는 어디 소속, 뭐 그런 식이죠”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위해 노래를 만들면 어떨까?"...문득 찾아 든 생각
박 지부장은 지난 5월경 어느날 피켓팅을 하는 집회장에 갔는데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투쟁가 류의 노래를 듣다가 ‘투쟁을 하거나 파업하거나 할 때 우리 콜센터 상담사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노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해서 바로 쳇지티피(Chat Gpt)에 ‘나는 콜센터를 다니는데 노래를 만들고 싶은데 이런 내용인데’하고 물어봤다. 박 지부장은 혹시나 하고 물어본 이후 깜짝 놀랐다고 한다. 큰 기대는 없었는데 쳇지티피가 가능함을 알려줬다는 것.
“처음에는 그동안 느낀 내용을 다듬어 AI를 거쳤고 가만 생각해보니 노래가 되려면 박자가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또 막 찾아봤죠. 그 이후로부터는 박자를 찾아서 넣었는데 또 노래가 정말 되더라고요. 하지만 박자가 일단은 마음에 안 들었어요. 노래 가사는 마음에 드는데. 유료를 쓰기 시작했죠”
박 지부장은 마치 심 봉사가 눈을 뜬 것처럼 이 콜센터 노래 만드는데 열중했다. 밤낮없이 계속 노래를 만들고 마음에 안들면 지우고 다시 만들어 보고 이렇게저렇게 해보는 시간을 거쳤다.
“몇 곡을 다른 콜센터에서 하는 행사나 선전전에 들고 가서 들려 주었더니 다른 상담사분들이 ‘어떻게 우리 이야기랑 똑같냐’하시며 기분이 되게 좋았어요. 그래서 약간 자신감이 붙었죠”
박 지부장이 그렇게 만든 곳은 현재 100여곡에 이른다. 자신은 그중 20곡밖에 마음에 안 든다고는 하지만 그 공감대는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어떤 콜센터에서는 '아침 출근길에 자신들의 회사 이름이 들어간 노래가 나오니 좋아하더라'고 소개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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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이여, 콜센터 노동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 늘 그래왔듯 우리는 투명인간 취급. 올해도 상담사는 외면한채 더 싼 하청을 찾아 떠도는 너희. 1년 혹은 3년마다 붙는 입찰 공고, 더 싼 값에 우리의 노동은 거래된다. 말 한다미 못한 채 같은 일을, 다른 이름으로 이어간다. 저렴한 하청은 이익만 챙기고 책임은 모두 우리 몫. 연차는 리셋, 근속은 무시. 이래서 상담사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가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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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셋 속에 쏟아지는 소리들. 귀를 찌르는듯한 폭언, 희롱섞인 말투. 그안에 최저임금에 갇힌 내 하루, 하루. 벗어나야만 이 길이 끝나는 걸까. 최저임금밖에 모르는 사장님아 이 돈으로 니가 한번 살아볼래? 숨 막히는 이 삶을, 고된 콜센터의 노동자의 삶을 너도 한번 살아봐. 내 피땀으로 모은 자본을 너희들은 배만 불려가고 나를 부르는 건 통장에 찍힌 최저임금뿐..." '이 돈으로 니가 한번 살아볼래' 가사 중. |
노래에 이어 만화에도 도전..."동료 콜센터 감정노동자들을 위해 만들겠다"
박 지부장은 이후 만화도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콜센터 상담사분한테 들었는데요. 한 상담사분이 배가 너무 아픈데 관리자한테 허락을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화장실 가는 것을요. 그래서 AI에게 이런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만화를 만들어 보기 시작했어요. 한 번에 안 만들어져서 여러 조건들을 계속 제시하면서 여러번 바꾸며 결국 상황에 딱 맞는 만화를 만들어 낸 거죠”
자신의 경험과 동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래와 만화를 만들어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박은영 지부장은 콜센터 상담사들, 감정 노동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콜센터 상담사분들 노동조합 가입은 필수라고 봐요. 왜냐하면 콜센터가 솔직히 갈데가 굉장히 많거든요. 여기 아니면 이쪽으로 가고, 여기 마음에 안 들면 저쪽으로 가고, 그리고 많이 옮겨 다녀서 어떤 때는 메뚜기 상담사라고 하는 케이스가 많아요. 그런데 한 자리에 오래 있고 내 노동의 권리를 지키려면 콜센터 상담사들은 노조 가입하는 게 맞습니다. 가입하고 싶어도 선뜻 가입을 못하고 누군가 나서주겠지라는 그런 것을 기대하거든요. 그런 기대를 하지 말고 본인이 직접 발로 뛰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 지부장은 시민들에게도 부탁이 있다고 말했다.
“솔직히 내가 전화를 하면서도 그게 갑질인지 모르는 게 많아요. 그냥 물어봤는데 뭐 어쩌라고, 그런데 그게 갑질인 경우도 있거든요. 내가 화가 나서 하는 말이 상담사한테 비수로 꽂힐 수 있는 부분이고 그게 감정 노동으로 상담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에요. 그러니까 전화하실 때 무난하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족한테 편하게 통화한다는 기분으로요, 부탁드립니다”
사무금융우분투재단이 2021년 콜센터노동자 663명 대상으로 실시한 '콜센터노동자 마음건강 실태조사'에서 87.5%가 감정노동으로 인한 우울감을 호소하고 48.7%가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감정 노동자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절실히 요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