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배의 말이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정치는 흔히 좌우 대립으로 설명된다. 극단주의를 관찰해보라. 좌와 우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행동방식은 매우 비슷하다.
이른바 말발굽(horseshoe) 이론이다. 정치 스펙트럼이 좌우 방향으로 직선이 아니라, 양 끝이 휘어져 다시 가까워지는 말발굽 모양이다. 극좌와 극우는 서로 외침만 다를 뿐, 행태와 성향에선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한국에선 더더욱 그렇다.
극좌와 극우의 공통적 특징의 첫번째, ‘절대성’이다. 양쪽 극단 모두 자신들이 ‘진리의 편’에 서 있다고 믿으며, 상대를 ‘악’으로 여기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관용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인 다양성 다원성 정치적 상대성은 불필요하거나 위험한 가치다. 극단주의는 항상 ‘적의 존재’를 필요로 하며, 다층적 현실 문제를 흑백 논리로 단순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모두 음모론과 도덕적 절대주의에 의존한다. 극좌는 구조적 모순과 불평등을, 극우는 반국가 세력을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한다. 다른 언어를 쓰지만, 문제를 획일화해 분노를 동원하는 방식은 사실상 같다.
세번째, 모두 지도자 숭배를 좋아한다. 극단주의는 ‘영웅 서사’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의 복잡한 과정을 비효율적이라고 보고, 빠른 결단, 강력한 행동, 급진적 조치를 요구한다. 온건성, 합리주의, 제도적 절차가 오히려 배격 대상이 된다. 철통같은 리더십의 선동가가 정치 중심에 서는 이유다. 역사적으로 극좌와 극우 모두 전체주의로 수렴한 건 이념은 달랐지만 행동방식이 같았기 때문이다.
네번째, 모두 폭력을 정당화한다. 극좌는 계급해방을, 극우는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폭력을 정당화한 사례가 많다. 폭력의 정당화는 정치 규범을 빠르게 붕괴시킨다. 결국 극단주의는 정치적 갈등을 제도 안에서 해결하기보다, 제도 밖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렇게 민주주의에서 탈선이 시작된다.
민주주의는 후련한 게 아니다. 그 핵심은 타협과 조정이다. 공존을 위해서다. 극단주의는 이성적 토론보다 감정적 동원을 선호한다. 지지층을 흥분시키는 방법이 가장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리적 정책 역량을 가진 정치인보다 분노·선동·극단적 언사에 능한 ‘유튜브형 정치인’이 득세한다. 그들은 타협을 ‘배신’, 양보는 ‘굴복’, 협상은 ‘패배’로 규정한다. 그리고 정치를 협조 게임에서 ‘제로섬’ 게임으로 바꾸어버린다. 그 결과 정치의 질이 하락하고 정책은 실종된다. 국민이 정치를 불신하면 역설적이게도 선동가가 더 유리해지는 자기강화적 악순환 단계가 시작된다.
극좌와 극우는 서로 대립하는 것 같지만, 사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다. 한쪽이 강해지면 반대쪽도 강해진다. 서로를 ‘볼세비즘’ 또는 ‘파시즘’으로 공격하며, 상대 진영의 극단성을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활용할 뿐이다. 온건한 다수는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사회는 결국 전체주의로 수렴한다. 극좌와 극우는 실은 ‘묵시적 협력’ 관계다. 서로 돕고 불량정치를 통해 같이 이득을 얻는다.
부작용은 제도에 대한 신뢰 상실이고, 진짜 피해자는 국민이다. 경계해야 할 건 좌냐 우냐가 아니라, 합리를 파괴하고, 갈등을 증폭시키며, 정치수준을 떨어뜨리는 극단주의의 방식 그 자체인 것이다. 극단주의에서 멀어질수록 정치가 정상화되고, 사회는 더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서도 제도의 신뢰성이 필요조건이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건 극단주의를 지양하고 민주주의의 본래 정신을 되찾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정치도 되고 경제도 된다.
